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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의 양조위와 비누

by khany 2008. 1. 5.

별들의 침묵


한 백인 인류학자가

어느 날 밤 칼리하리 사막에서

부시맨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은 별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부시맨들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가 농담을 하고 있거나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고 여기면서.


농사를 지은 적도 없고

사냥할 도구도 변변치 않으며

평생 거의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살아온

두 명의 키 작은 부시맨이

그 인류학자를

모닥불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으로 데려가

밤하늘 아래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런 다음 한 사람이 속삭이며 물었다.

이제는 별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느냐고.

그는 의심스런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지만

아무리 해도 들리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부시맨들은 그를 마치 아픈 사람처럼

천천히 모닥불가로 데려간 뒤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말했다.

참으로 안된 일이라고, 참으로 유감이라고.


인류학자는 오히려 자신이 더 유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이

듣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 데이비드 웨이고너



중경삼림의 양조위와 비누.


  어느 나라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일본의 대사가 중추절에 서양의 외교관들을 달맞이행사에 초청했단다. 미리 자리를 잡고 연못위에, 술잔에 담긴 달을 마시며 기다리고 있자니 백인들이 손에 하나같이 천체망원경을 들고 나타났다고 한다. 서양의 자연에 대한 태도다. 조선시대에 중국에서 들어온 천체망원경을 보고 왕은 오랑캐의 물건을 치우라며 태양은 맨눈으로 보는 게 아름답다고 했단다. 우리에게 자연은 바깥에 두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들어가 함께 사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태초에 아담의 언어가 있었다고 한다. 사물의 본질이 그대로 이름으로 떠올라서 언어가 곧 그것이었던 때가 있었단다. 백인의 문명은 아담의 언어를 담은 사물과의 관계에서 쫓겨나 바벨의 언어를 만들었다. 합리주의는 사물을 3자의 위치에 두고 과학은 자연을 자원의 보고라고 칭하기에 이른다. 자연은 인간과 삶 속에 함께 있던 자리에서 떠밀려 인간의 바깥에서 정복당하고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는 위치로 밀렸다. 그런 백인들의 귀에 별의 노래가 들릴 리가 없다.


  백인에게 점령되기 이전이었는지도 모른다. 문명의 혜택 속에서 이미 자연과의 교감을 잃은 지 오래지만, 백인들이 부시맨보다 더 낫게 봐주지 않던 시절의 우리는 아직 자연과 하나였었다. 그들은 문명이라는 이름아래 눈을 뜨게 해주는 대신 듣는 귀를 빼앗아 버렸다. 우리도 이젠 백인의 문화를 들이쉬고 찬양한다. 그런 우리가 어릴 적에 듣던 자연의 소리를 잃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자연과 심지어는 사물과 얘기를 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들이받고도 삼촌더러 책상을 ‘때찌’해달라고 조르던 시절이 있었다. 책상이 나와 소통하던 시절이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서 양조위가 비누하고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관객들은 모두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미친 거 아냐?’라고도 했다. 예전에 나는 그러지 않았을 텐데. 철들면 죽는 줄 알았는데 안 죽고 철이 들고, 합리적이 되어 버린 건가? 이제 우린 부시맨의 편이 아니라 백인의 편에 서 있다.


  한 백인 인류학자가 포기하고 유감으로 생각하는 일을 다시 해보기로 한다. 다시 별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오늘은 거리에서 간판에 가로등에 신호등에 말을 건다. 만들어진 것 말고는 자연을 가까이 하기도 힘들어진 도시에서, 너무 밝은 빛이 밤을 삼켜 버린 도시에서 별의 노래를 듣는 부시맨이 되고 싶다. 네온사인의 노래라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이 밤엔 양조위처럼 비누에게 말이라도 걸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