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기

희곡《오이디푸스》를 통해 본 플롯의 기능

by khany 2008. 1. 5.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땐 쓰려고 하는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시작하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처음부터 순차적으로 이야기를 나열하는 방식은 수용자들에게 호기심이나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주인공의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순차적으로 나열했다면 재미는 반감되고, 수용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실패했을 것이며, 사람들은 쉽게 그 연극에 빠져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위험에서 벗어나고, 관객에겐 보는 즐거움을 창작자에겐 쓰는 즐거움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플롯이 아닐까?


  플롯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국어사전엔 ‘[명사]<문학>=구성(構成).’ 이라고 나온다. 구성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문학에 관련된 해석을 보자면,

  ‘<문학> 문학 작품에서 형상화를 위한 여러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배열하거나 서술하는 일.≒플롯(plot).’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콜린스 코빌드 영영 사전에 의하면,

  ‘The plot of a film, novel, or play is the connected series of events which make up the story.’이다. 마지막으로 백과사전은 ‘이야기가 시간적 경과에 의한 줄거리의 전개를 뜻하는 것이라면 플롯은 작품의 주제를 증명하는 데 관련된 등장인물 등의 내적(內的) 인과관계를 추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플롯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유기적인 결합이며, 또한 이야기이면서도 줄거리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영국의 작가이며 이론가인 E.M.포스터는 《소설의 제양상》에서 줄거리(story)와 플롯(plot)을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야기는 사건들을 그냥 연속적으로 결합시켜 간 것이라면, 플롯은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도록 결합시켜 놓은 것을 가리킨다.' 라고 했다. "왕이 죽고 또 얼마 안 가서 왕비도 죽었다."는 식으로 사건을 전개하면 그것은 하나의 스토리이고, "왕이 죽고 얼마 안 가 슬픔이 너무 컸기에 왕비도 죽었다."라고 줄거리를 구성하면 플롯이 가해진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플롯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필연적인 인과관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플롯을 비극의 생명이자 영혼에 비유했다. 이것이 비극의 최우선적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일으키는 사건의 모방이라고 했다. 그런 비극의 주인공이 악한이거나 신적인 존재라면 그 카타르시스나 감정이입이 힘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공이 우리와 비슷한 선한 자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그가 순전히 과오로 인해 불행에 빠져야만 관객들이 함께 연민과 두려움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에서 플롯의 통일은 한 사람의 이야기만을 취급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왕을 죽인 자를 찾아야 하는 이유는 나라에 창궐한 역병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함이요. 왕이 되기 전 여행 중의 삼거리에서의 결투는 그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와의 신탁의 실행이었으며 스핑크스를 만나서 수수께끼를 푼 것은 테바이의 왕이 되기 위한 것이다. 테바이의 왕이 된다는 것은 왕비 이오카스테와의 결혼을 뜻하며 그 결혼은 남편에게서 남편을, 자식에게서 자식을 낳게 한 이중의 결혼을 위한 플롯이었던 것이다. 또한 소포클레스는 이야기의 흐름을 해치는 그 어떤 삽화도 비극 속에 넣지 않았다. 그것은 작품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높이고 이야기의 흐름을 유기적으로 이끌고 있다. 이것은 《시학》의 ‘비극은 완결된 행동의 모방이자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모방이다.’ 라는 정의와 필연적, 개연적인 결과로 한 사건이 다른 사건에 ‘인하여’ 일어나는 것과 ‘이어서’ 일어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좋은 예이다. 《시학》에서 전체적인 이야기의 구성에 관계없이 나열된 삽화적 플롯이 주를 이루는 서사시보다 비극을 더 높이 대접한 것은 이 플롯의 필연적인 인과관계에 있으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좋은 작품에 손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이디푸스》가 플롯이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는 다른 이유는 작품 속에 나타난 급전, 발견 그리고 파토스에 있다. 급전, 발견, 파토스는 플롯이 가진 세 가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카드모스의 도성으로 와서 세금을 징수해 가던 가혹한 여가수(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왕비와 결혼해 아들과 딸을 낳고 누구도 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라의 창궐한 역병으로 인해 선대왕 라이오스를 죽인 자를 찾아야한다는 신탁을 받게 되어 라이오스왕을 죽인 자에게 끔찍한 형벌을 약속한다. 그리고 점차 자신이 그 살인자가 아닐까? 하는 의구로 빠져드는 오이디푸스. 결국엔 자신이 라이오스왕을 죽였으며, 자신의 입으로 말한 끔찍한 형벌을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손과 의지로 행하게 된다. 급전은 이야기가 갑자기 반대방향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가장 고귀한 자에서 가장 추악한 자가 된다.

  여기서 발견이 급전과 함께 일어나는 점이 이 작품의 뛰어난 점이다. 이와 같이 발견이 사건 자체로부터 유발되어 급전과 결합될 때 관객들에게서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가장 잘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가장 훌륭한 발견의 방법으로 《오이디푸스》를 예로 들기도 한다.

  자기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행위인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그것을 발견하고 급전직하(急轉直下)의 상황에 놓인 오이디푸스는 자결한 아내이자 어머니의 옷에서 황금 브로치를 빼들고 그것으로 자신의 두 눈알을 자신의 손(의지)으로 찌른다. 여기서 파토스는 절정을 이룬다. 얼굴에 핏자국을 남긴 채 감긴 눈으로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 등장한 오이디푸스를 보며 관객들은 연민과 공포의 카타르시스를 느꼈으리라. 이제 그는 왕위도 아내도 잃은 채 가족들과도 떨어져 홀몸으로 어디에도 의탁할 곳이 없으며, 누구도 말을 걸어서는 안 되는 추방 자가 되어 나라에서 쫓겨나야 할 운명에 이른 것이다.


  《오이디푸스》를 보는 견해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인간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어서, 아무리 피하려고 애써도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신탁을 피하려 자기의 부모의 나라를 떠났던 것이 오히려 화를 자초한 것처럼 말이다.

  다른 의견은 신 또는 외부로부터의 의지와 인간 또는 내부로부터의 의지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라는 절망적이고 가망 없는 투쟁에서도 타협을 거부하고, 파멸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위대함과 존엄을 지키고 보여주는 데 있다는 관점이다.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사신을 따라 코린토스로 돌아갔다면 피할 수 있었던 불행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진실을 밝히고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인간의 존엄을 지킨 것이라는 견해이다.

  운명을 피할 것이 아니라 운명에 맞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이오스는 신탁을 넘어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그를 버리지 않고 키웠다면,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알고도 자기나라를 떠나지 않고, 부모의 곁에 머물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라이오스가 자식을 버리지 않고 키웠다면 신탁이 지켜지기 위해 오이디푸스는 왕위의 권력에 눈이 먼 칼리큘라(카라칼라)가 될 것인가? 그가 자신의 의지로 패륜을 저지르고 마지막에 자신의 나라에서 추방당하거나 살해된다면 그것은 비극이 아닐 것이다. 관객들은 악한의 불행을 보고 연민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를 쓰면서 다른 여러 플롯들을 대입해 보았을 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 그는 가장 비극적인 플롯을 선택했고, 그것을 사람들의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완벽한 인과관계로 만들어냈다. 그것이 이 작품이 고대로부터 추앙받는 이유일 것이다. 이 비극의 플롯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마지막 코로스의 인용으로 이 글을 마친다.


코로스

  오오 조국 테바이의 시민들이여, 보라, 이 분이 오이디푸스다.

  그는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 권세가 당당했으니

  그의 행운을 어느 시민이 선망의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보라, 그러한 그가 얼마나 무서운 고뇌의 풍파에 휩쓸렸는지를!

  그러니 우리의 눈이 그 마지막 날을 보고자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는

  죽어야 할 인간일랑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말라,

  삶의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해방될 때 까지는.




참고문헌:

시학 :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오이디푸스 : 소포클레스,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미학오디세이1권 : 진중권, 휴머니스트.